겨울빛 35호
겨울빛 얼음 위에 얼음조각을 떼어이글루 짓고늙은 백곰 껍질 기워 입고숨구멍을 찾아 목 내미는물범을 향해뾰족한 창끝으로온몸을 던진다지 빙판은 선혈로 노을 졌겠다 뼛속까지 얼어붙는칼 추위는 차라리노을이 편안했을까 …
겨울 지리산 34호
겨울 지리산 가시덤불에 뜯긴실핏줄 같은 고라니 말간 털이허공을 날아간다 인간끼리쇠막대기로 불을 뿜던 시린 그 시대눈치도 없이눈 속 보리 이삭 뜯어 먹으며 살아남았었지불타고 꺾인 나무도 옹이를 가슴에 감추고아름드리로 그때를 지우고 있는데 …
얼음꽃 33호
얼음꽃 아버지는 막걸릿잔을 들고 사셨고어머니는 호미를 들고 사셨지어머니의 땅은 겨울이었고언 땅을 헤집고 희망의 불씨를 심으셨지언 땅에서도 막걸릿잔은 길어 올리셔야 했고아이들은 허수아비 옷을 빌려 입고술잔이 깨진 사금파리 위를 걸어학교에 다녔지…
그 스님 32호
그 스님 산새 소리 쫓아입산수도 꿈꾼 그녀는 이태원 낯선 풍물에라틴 음악을 따라땀에 젖어 춤도 추었단다교만한 권력에 돌팔매질, 목도 쉬었단다학원에서 아이들 품어도 보았단다 지리산 단풍이 고와 산 벚꽃이 아려눈물에 젖었단다…
번지 점프 31호
번지 점프 날개는 없었지중력은 무너지고거미줄 한 가닥 꽁지에 매달고현생과 후생을 기웃거리며홍시처럼 떨어지고 있었지 그래, 뛰어내리고 싶은 날도 있었지꽃 피는 푸른 계절에도열매 주렁주렁 매달은 수확의 계절에도슬쩍, 목덜미 잡아당…
의신 반달곰 30호
의신 반달곰 큐피드 화살이가슴에 꽂혀순백의 하트를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는반달곰을 보았는가 화개골 의신 마을에 가면 흐르는 냇물 소리 맑아도토리 익어가는 늦가을사람들의 정담에 이끌려 마을로내려온 반달곰이산으로 돌아갈 생각 …
반딧불이 29호
반딧불이 부끄러워서만은 아니었지어둠에 익숙한더듬이가 있어서도 아니었지 부모님 눈치 보다가아니면, 올망졸망 아이들눈빛 때문이기도 하고 등잔불 끄고캄캄한 어둠 속에서심장에 불 밝히고사랑을 속삭였었지 …
압화(押花) 28호
압화(押花) 꽃을 바라보다꽃의 마음을 꺾어왔다놀란 꽃의 어깨를 다독이며가슴에 품어석 달 열흘 산고의 진통을 겪고신생의 꽃으로 분만했다 생을 잃은 꽃에게 전생의 생을 불어넣는 일이란죽음을 경험하는 일과도 같아오체투지로 적멸의 시…
부자병 27호
부자병 화원의 영지에는벌 나비 아픔도 다양하지얼굴이 아파서 오는 나비족마음이 아파서 오는 사슴족허리가 굵다고 오는 꽃돼지족도 있지 성형외과는 머리를 바꾸어주는마법의 바느질이 바쁘고정신과에도 흐트러진 기억의 퍼즐을 맞추느라마른 …
민박집 인연 26호
민박집 인연 우리 만난 적 있나요전생에서아니면현생 어디선가몇억 광년 떨어진 은하의 저쪽푸른 행성일까요 섬진강물은아닐 것이라고 손사래치지만 포항에서 서울에서 광주에서남태평양 저 멀리 적도에서불쑥 찾아와 웃고 있네…
블랙커피 25호
블랙커피 커피 드립에서뜨거운 마법이 뛰어 내린다 먼 길 달려와 내뿜는 정열의 체취나는 너의 국적을 묻지 않았다나는 너의 신분도 묻지 않았다 투박한 머그잔 속에 온순한 흑표범 그냥 말없이…
불새 24호
불새 깊이를 알지 못했나요작은 새가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나는, 물빛을 마시다 말고 숨을 멈추고 마른 태양을 깜박거렸습니다 육지 생명이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시퍼런 죽음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삶…
어머니 23호
어머니 정화수도 말라버린 쓸쓸한장독대에텅 빈 항아리 계십니다 가난한 집에 시집오셔서맹물만 드셔도 배부르다고 하시던 당신 단단한 메줏덩어리세상인심으로 맛 들여놓으시고생 무우 배추 품어 겨우내뜨거…
몽유도원 22호
몽유도원 숲길에발그스레 취한 빈 소주병이마법에 걸려 꿈꾸고 있다 어쩌자고, 골짜기 깊어벼랑에서 떨어지는 물줄기지친 어깨 두드리며 쉬어가라 하고이끼긴 바윗돌은 뭉게구름이고나뭇잎은 팔랑팔랑 천마리 나비라배낭 속 …
목통 물레방아 21호
목통 물레방아 뜨거운 심장이 뛰는 소리였지쉼 없이 쏟아지는 물줄기가 돌리는열두 필의 말발굽 소리 보리 방아 찧고 밀가루를 빻고귀하디귀한 나락을 도정 할 때는쌀겨가 나와짐승들 밥그릇도 따뜻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