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남 작가의 억수로 반갑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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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남 작가의 억수로 반갑대이
56. 엄마 맛
날씨가 추워지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면 먹고 싶은 게 있습니다. 순대국, 김치전, 낙지볶음, 추어탕, 매운닭발...... 그렇게 말하자 “그거, 술안주 아니야?” 하고 놀라던 친구의 얼굴이 생각나 혼자 웃습니다.
사실은 가장 먹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친정엄마가 만든 돼지고기 보쌈! 그건 지금 서울에서 당장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닙니다. 엄마는 지금 하동의 고향 집에 계십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 방학이 되면 집 앞에서 “우리 지금 출발했어요.”라고 전화를 드립니다. 그러면 엄마는 으레 “보쌈 해놓을 테니 쉬엄쉬엄 내려와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입안에는 하나 가득 달콤한 침이 괴기 시작했지요.
우리 전화를 받자마자 엄마는 하루에 대여섯 번 운행하는 버스를 타고 면사무소가 있는 ‘정서마을’로 달려갑니다. 단골 식육점에서 토종 돼지고기를 양껏 사서 집으로 총총 돌아옵니다. 항아리에서 퍼온 된장과 고추장을 적당히 섞고 계피, 감초, 통마늘, 생강을 부엌 가마솥에 넣고 물을 붓습니다. 두툼한 돼지고기를 가마솥 안에 고루 펴서 안칩니다. 그리고 아궁이에 솔가지와 장작으로 불을 지핍니다. 가마솥 뚜껑 새로 김이 나오기 시작하면 불이 붙어 있는 장작 높이를 조절하고 돼지고기를 나무젓가락으로 찔러서 잘 익었는지 확인합니다.
그다음으로 엄마는 앞뒤 마당을 돌아다니며 싱싱한 푸성귀를 땁니다. 노란 배춧속과 여린 머위 잎, 민들레와 고들빼기, 빨갛고 파란 고추도 한 아름 땁니다. 앞마당 수돗가에서 야채를 씻어 대바구니에 담아 놓습니다. 된장과 고추장을 섞어 쌈장을 만들고 삭혀 두었던 고추와 깻잎절임을 꺼냅니다. 여린 엄나무 순과 뽕나무 잎을 따서 담근 절임과 매실장아찌, 매실주도 준비합니다.
또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뒤뜰에 있는 재피나무에서 쥐똥만한 열매를 따서 껍질을 말리고 빻아서 마련한 재피가루를 내놓는 것입니다. 내가 야채 겉절이에다 재피가루를 뿌린 그 오묘한 맛을 좋아하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엄마는 서울사람들이 추어탕에 넣는 가루를 산초가루라고 하는데 그게 잘못된 거라고 말했습니다. 겉으로는 두 나무를 식별하기 어렵지만, 산초나무에서는 기름만 짜고 재피나무에서 가루를 얻는 것이랍니다. 난 엄마 말이 확실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친정아버지가 뇌졸중에 걸리기 전 일이 생각납니다. 호남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전주, 남원을 지나 구례로 접어들 때쯤이면 두 분은 앉아서 기다리다 못해 우리를 마중 나오셨습니다. 아버지가 빨간 프라이드 승용차를 몰아서 화개장터쯤에 서 계셨습니다. 아이들이 공처럼 튀어나가 하얀 모시옷을 입은 두 분에게 안기면 “아이구, 내 강생이들 왔나.” 하고 기뻐하셨습니다. 아이들은 아빠와 엄마를 놔두고 외할아버지 차에 올라탔습니다. 뒷좌석 가운데 앉은 외할머니 양손을 하나씩 잡은 채 평사리 넓은 뜰을 지나고 악양 골짜기를 구불구불 돌아 고향 집에 도착했습니다.
아버지는 우리들이 짐도 풀기 전에 대청마루에 둥근 상을 폈습니다. 엄마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돼지고기를 푸짐하게 썰고, 아이들은 재미있는 놀이라도 하는 양 푸성귀가 담긴 대바구니와 반찬들을 하나씩 상으로 옮겼습니다. “피곤할 틴디 우리 강생이들 앉아서 쉬제.” 하면서 함박웃음을 짓던 아버지와 엄마.
이제는 두 분이 함께 앉아 계시는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리가 불편한 팔순의 친정엄마도 예전처럼 음식을 만들 수 없습니다. 제 머리칼이 희고 주름이 늘어난 만큼 아이들은 비 맞은 푸성귀처럼 쑥쑥 자라 어느덧 성인이 되었습니다. 걷잡을 수 없이, 거침없이 세월이 흘러갑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친정엄마의 그때 그 손맛이 그립습니다. 내 아이들은 외할머니의 손맛이 아닌, 엄마의 손맛으로 무엇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엄마, 나 지금 출발해요. 돼지고기 삶아줄래요?” 이렇게 전화를 걸고 무작정 길을 나서고 싶습니다. 환상의 그 길, 섬진강을 오른쪽으로 낀 19번 국도를 달려서 뜨끈하게 불 지핀 온돌방에 눕고 싶습니다.
지금 창밖에는 주룩주룩 늦가을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김우남_소설가
경남 하동 출생. 본명 김희숙.
⟪실천문학⟫소설신인문학상으로 작가 등단.
소설집⟪뻐꾸기날리다⟫⟪굿바이굿바이⟫⟪엘리베이터 타는 여자⟫
⟪아이 캔 두 이모⟫장편소설⟪릴리 그녀의 집은 어디인가⟫출간.
직지소설문학상, 노아중편문학상, 이화문학푸른상 수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및 경기문화재단 ‘우수도서’ 및 ‘문학나눔’ 다수 선정.
한국작가회의회원, 한국소설가협회회원, 이대동창문인회 이사.
한국도서관협회 ‘문학작가파견사업’ 및 ‘길위의인문학’ 5회 선정.
이화여자대학교 및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졸업.
Email: nim19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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