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남 작가의 억수로 반갑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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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다정한 것들을 위하여!
유난히 어수선하고 시끄러웠던 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한 해의 모퉁이를 돌며 입속에서 오래도록 굴리고 싶은 단어가 있습니다. 다정한 목소리, 다정한 이웃, 다정한 너, 다정한 세상....... ‘다정(多情)’이라는 단어를 붙이면 마치 목화 솜이불처럼 무겁지 않고 포근한 의미가 됩니다.
몇 년 전부터 다정한 것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무엇이 우리를 다정하게 만드는가》 《가장 다정한 전염》 《레드 헬리콥터: 다정함으로 변화를 만들어내는 방법》 등은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다정한 것의 힘을 강조합니다. 뇌를 들여다본 과학자들은 다정함이 우리의 본성임을 일깨워 줍니다. 집단 내 타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능력이 진화를 통해서 획득한 우리 종 고유의 특성이랍니다. 컬럼비아대학의 엘리자베스 던 교수는 연구를 통해서, 유아들조차 자신이 간식을 받았을 때보다 그 간식을 나눠줬을 때 행복지표가 더 높았다고 합니다.
《레드 헬리콥터》에서 제임스 리는 망해가던 의류업체 애슐리스튜어트를 파산에서 구하고 흑자 전환시킨 비결을 ‘다정함’과 ‘약간의 숫자’ 덕분이라고 말합니다. 다섯 살 때 친구에게 점심을 나눠준 친절에 대한 보상으로 빨간 헬리콥터 장난감을 선물로 받았는데, 그는 존폐 위기에 처한 회사를 구원할 키워드를 이 기억에서 찾습니다. 그리고 동네 사랑방 같은 매장, 고객과 직원들의 유대, 고객의 브랜드에 대한 사랑 등 다정함을 하나의 문화로 키워나갑니다. 그러자 매출이 V자 곡선을 그리며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합니다.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 어려운 형편인데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기부를 하는 의인들 이야기를 접합니다. 전주시 노송동 ‘얼굴 없는 천사’는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와 세밑 한파를 녹였습니다. 올해로 25년째인데, A4용지 상자 안에 8천만 원이 넘는 금액이 들어 있었습니다.
미용사 조슈아는 퇴근길에 마주친 노숙자의 머리를 공짜로 깎아 주고 그들의 다양한 사연과 헤어컷 사진을 ‘Do Something For Nothing (대가를 바라지 말고 뭐든 하라)’ 해시태그와 함께 인스타그램에 올려 화제가 되었고, 이는 하나의 사회운동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지팡이 없이는 걷기 힘든 99세의 무어가 코로나19로 궁지에 몰린 의료진을 돕겠다며 자기 집 정원 100바퀴 돌기 챌린지를 벌여 무려 3200만 파운드(한화 540억 원)를 모금한 일도 있습니다.
저는 연초에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눈물을 닦아 준 판사’라는 기자의 글을 읽고 마음이 훈훈했습니다. 50대 최 씨가 세입자 229명에게 보증금 180억 원을 돌려주지 않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40대 중반의 피해자는 “잘못한 게 없는데 잘못한 것 같다”고 자책했고, 결혼을 앞둔 피해자는 상견례 전날 파혼을 당했습니다. 이에 부산지법 박주영 판사는 최 씨에게 검찰 구형보다 2년 더 많은 징역 15년을 선고했습니다.
그리고 박 판사는 피해자들에게 “한 개인의 욕망과 탐욕을 적절히 제어하지 못한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이 여러분과 같은 선량한 피해자를 만든 것”이라며 “결코 여러분이 뭔가 부족해서 피해를 당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얼마나 다정한 위로입니까? 판사의 말에 법정은 눈물바다가 됐고, 한 피해자는 “형량보다도 우리 잘못이 아니란 걸 인정받았다는 점이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답니다.
타인을 향한 관심과 연민, 돕고 나누고 베풀려는 인간의 선한 충동은 바이러스처럼 전염될 수 있습니다. 전 세계에 지식 나눔을 실천하는 TED의 대표 크리스 앤더슨은 지금의 초연결성이 ‘다정한 전염’을 가능케 한다고 강조합니다. 게다가 앤더슨은 ‘이기적이지 않은 선행은 없다. 의도보다 효과에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즉 자기 평판을 위해 관대함을 베푸는 사람들을 대놓고 칭찬하라고 권합니다. 그래야 더 많은 사람이 선하게 행동하도록 설득할 문이 열리기 때문이랍니다.
2025년 새해는 온통 다정한 말과 다정한 웃음이 넘치는 세상이 되기를 염원하며 기도합니다.
김우남_소설가
경남 하동 출생. 본명 김희숙.
⟪실천문학⟫소설신인문학상으로 작가 등단.
소설집⟪뻐꾸기날리다⟫⟪굿바이굿바이⟫⟪엘리베이터 타는 여자⟫
⟪아이 캔 두 이모⟫장편소설⟪릴리 그녀의 집은 어디인가⟫출간.
직지소설문학상, 노아중편문학상, 이화문학푸른상 수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및 경기문화재단 ‘우수도서’ 및 ‘문학나눔’ 다수 선정.
한국작가회의회원, 한국소설가협회회원, 이대동창문인회 이사.
한국도서관협회 ‘문학작가파견사업’ 및 ‘길위의인문학’ 5회 선정.
이화여자대학교 및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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