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남 작가의 억수로 반갑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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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비우면 가벼워집니다
오랫동안 폐암 투병을 한 대학 후배가 있습니다. 수술과 항암치료를 여러 번 진행하는 과정에서 머리카락이 빠졌다가 나기를 거듭했습니다. 그러나 늘 밝게 웃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영어든 글쓰기든 배우는 일을 놓지 않았습니다. 또 걷기 여행을 즐겼습니다. 오죽하면 내가 “너 진짜 암 환자 맞아? 사이비환자 아니야?” 하고 농담을 했겠습니까? 그만큼 적극적이고 긍정적이었기에 긴 시간을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던 그녀였지만 최근에 결국 호스피스 병동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녀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짐 정리를 해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죽고 나면 유품이라는 이름으로 폐품 혹은 쓰레기 처리되는데 미리 정리하여 쓸 수 있는 것을 주변에 나누어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평소에 우리는 외투나 가방, 액세서리 등을 서로 나눠 갖고, 되도록이면 쓰레기가 덜 나오게 하려고 애를 썼고, 자연환경을 사랑한다는 점에서 성격이 맞았습니다.
먼저 그 집 냉장고를 열어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고기, 생선, 떡, 야채, 각종 분말가루 등으로 가득 차서 더 이상 음식을 넣을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지인들이 몸에 좋다는 건강식을 이것저것 주었으나 그것을 다 소화하지 못한 탓이었습니다. 저는 음식들을 바로 해먹을 수 있는 것과 좀 더 보관 가능한 것, 나누어 먹을 것 그리고 너무 오래되어 폐기처분할 것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그 다음은 화장품 정리였습니다. 먹는 음식 다음으로 유통기한을 고려해야 할 제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기초화장품과 색조화장품, 둘 다 분량이 꽤 많았습니다. 피부 건조가 점점 심해지니 그것을 도와주는 성분의 화장품이 유난히 많았고, 뚜껑을 열지 않은 새 상품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깊숙한 곳에 똑같은 상품이 쌓여 있는 건 전신마취를 여러 번 해서 기억력을 많이 잃은 탓일 거라고 추측했습니다. 화장품도 쓰다 만 것은 버리고 여러 사람이 나누어 가질 수 있게 3단계 분류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냉장고 안도 화장대도 가벼워졌고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요즘 통신 판매 서비스 덕분에 돈만 지불하면 집에 앉아서 상품을 배달받을 수 있습니다. 또 사지 않아도 사은품이나 샘플이 마구 뿌려져서 물건이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게다가 한 곳에서 오래 살고 있으면 물건을 처분할 기회가 별로 없어서 짐이 점점 쌓이게 됩니다. 저도 한 집에서 30년, 그것도 주택이라 창고나 보일러실이 있어서 여기저기 쌓인 짐이 많습니다. 후배의 짐 정리를 도와주고 나자 불쑥 이런 의문이 생겼습니다.
‘만약 내가 갑자기 사고로 죽는다면 누가 내 유품을 정리할 것인가?’ ‘내가 실버타운이나 요양시설에 들어가게 되면 내가 쓰던 짐들은 어떻게 될까?’
낡은 사진첩에서 이런저런 옷에 이르기까지 유품 정리는 가족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또 고인이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해 온 물건을 갖다 버려야 한다는 죄책감도 느낄 수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치우고 정리한다는 말이 길게 자란 머리를 짧게 자른 후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처럼 기분전환의 이미지로 와 닿습니다. 그러나 노인에게 ‘정리합시다’라고 하면 죽음이 머지않았으니 정리하자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합니다. 마치 회사원들에게 ‘책상 정리 하시오’라는 말이 해고를 상징하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더 늙기 전에 주변을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의 어떤 수납 전문가는 그것을 ‘노전(老前) 정리’라고 표현합니다. 즉 노후(老後) 정리나 인생정리보다 훨씬 이전에 시작하는 것으로 미래의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이 정리 작업에는 물건만이 아니라 오랫동안 얽힌 인간관계나 금전 문제 등이 모두 포함됩니다. 이런 문제를 정리하면 인생이나 생활의 스트레스가 감소하고 마음이 개운해질 것입니다.
자, 그럼 우리도 지금부터 차근차근 짐 정리를 시작해볼까요? (소설가)
김우남_소설가
경남 하동 출생. 본명 김희숙.
⟪실천문학⟫소설신인문학상으로 작가 등단.
소설집⟪뻐꾸기날리다⟫⟪굿바이굿바이⟫⟪엘리베이터 타는 여자⟫출간.
장편소설⟪릴리 그녀의 집은 어디인가⟫출간.
직지소설문학상, 노아중편문학상, 이화문학푸른상 수상.
경기문화재단 ‘우수도서’ 및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도서’ ‘문학나눔’ 다수 선정.
한국작가회의회원, 한국소설가협회회원, 이대동창문인회 이사.
‘문학작가파견사업’ ‘내생애첫작가수업’ ‘길위의인문학’ 선정.
지역 도서관 및 문화센터 글쓰기, 인문학 강의.
이화여자대학교 및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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