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남 작가의 억수로 반갑대이 > 사설

본문 바로가기

사설

김우남 작가의 억수로 반갑대이

2024-07-03 15:36 57 0 26호

본문

b2be9843fd59600d55fc8ad11ded336d_1719988611_9747.jpg
 


김우남 작가의 억수로 반갑대이

26. 인생은 티타임!

 

 

한 달째 입원 중인 팔순 친정어머니의 병세가 많이 완화되었습니다. 걷기를 위한 재활치료를 시작한 어머니를 지켜보다가 오래전에 본 칠레 영화 티타임 (Tea Time)”을 떠올렸습니다. 이 영화는 80대 노파들의 수다로 시작됩니다. 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 위에는 꽃과 차와 케이크, 갓 구운 과자들이 가득합니다. 노파들은 커다란 귀고리에 목걸이를 하고 한껏 잘 차려입은 차림새입니다. 화사한 아이섀도에 새빨간 립스틱을 발랐지만 클로즈업된 그들의 얼굴에는 골 깊은 주름이 가득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60주년이 된 친구들 모임입니다.


노파들 중 한 사람이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 친구가 아프지 말라고 내가 기도하고 나면 그 친구가 꼭 죽어. 그러니까 이제는 기도를 하지 말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모두 소리를 내어 웃습니다. 이어서 너도나도 죽음을 화제로 삼습니다. 그들은 가깝게 지내던 친구의 죽음을 마치 쇼핑 얘기하듯 말합니다. 그들이 나누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조금도 무겁지 않습니다.

불쑥 첫사랑의 떨림에 대해서 말하는 친구도 있고, 죽은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고백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달라진 이성관과 동성애에 관해서 의견을 나누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결국 별것 아니었다는 듯 웃음으로 끝이 납니다. 그들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쉴 새 없이 케이크를 자르고, 과자를 먹고, 차를 마십니다.


같은 장면인 듯 다른 장면이고, 다른 얘기인가 하고 보면 지난번 이야기의 연속인 영화를 보면서 처음에는 의아한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특별한 주제도 없고 의미도 없는 80대 노파들의 수다를 왜 이렇게 오래 보여주고 있지?’ 그런데 그들의 대화를 엿듣다가 문득 깨달아지는 게 있었습니다. ‘, 삶이란 저런 거구나. 나라가 달라도, 세대가 달라도 인간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구나.’


영화 티타임 (Tea Time)”2015 EBS 국제다큐영화제 (EIDF)에서 대상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칠레의 여성 감독 마르테 알베르디는 친할머니의 차 마시는 모임을 5년 동안 영상으로 기록한 후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고교 시절 내가 만든 단편영화 상영회에 친할머니를 초청했는데 친구들과 티타임이 있어서 못 온다고 하셨어요. 당시엔 이해가 안 갔지만 그들에게 티타임이 삶에서 중요한 월례행사라는 걸 알았답니다.”라며 지난날을 회상합니다. 심사위원단은 영화적 아름다움이 뛰어나고 유쾌한 매력을 가진 영화이며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우정과 깊은 유대관계를 생각하게 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습니다.


모임 61주년, 62주년, 63주년. 기념사진 속 친구들의 수가 줄어듭니다. 8명이 6명이 되더니 5명으로 줄어들고....... 그들은 투병이나 죽음으로 인해 참석을 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늘어나자 허전하고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럴수록 친구들과 갖는 티타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상실의 아픔을 극복하는 힘이 됩니다.


알베르디 감독 자신에게도 티타임은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친할머니를 잃은 슬픔이 친할머니의 친구들 덕분에 가족의 죽음은 비극적 사건이 아니라 인생의 일부분이라고 이해하게 됐다고 말합니다.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생을 즐겨야 한다는 깨달음도 얻었다고 합니다.


백발이 고왔던 테레사는 친구들에게 이런 편지를 남깁니다.

나는 그저 강 건너편 길을 건너온 것뿐이야. 우리가 아름답게 나눴던 삶도 그대로 남아 있어. 그러니까 너무 슬퍼하지 말고 격식도 차리지 마. 예전하고 똑같이 내 얘기를 해줘. 우스운 얘기를 하며 똑같이 웃어줘. 곧 너희들도 길을 건너서 나를 따라와. 기다릴게.’

영화에서 보듯이, 생이란 그저 울고 웃고 지낸 한나절의 티타임에 불과한 걸까요? 인생의 기나긴 시간 속에서는 죽을 만큼 고통스럽던 원망과 분노조차 노파들의 수다처럼 가벼워지고 희석되어지는 걸까요?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우리들이 한껏 누리고 즐겨야 할 티타임이겠지요.



김우남_소설가

 

경남 하동 출생. 본명 김희숙.

실천문학소설신인문학상으로 작가 등단.

소설집뻐꾸기날리다⟫⟪굿바이굿바이⟫⟪엘리베이터 타는 여자

아이 캔 두 이모장편소설릴리 그녀의 집은 어디인가출간.

직지소설문학상, 노아중편문학상, 이화문학푸른상 수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및 경기문화재단 우수도서문학나눔다수 선정.

한국작가회의회원, 한국소설가협회회원, 이대동창문인회 이사.

한국도서관협회 문학작가파견사업길위의인문학’ 5회 선정.

이화여자대학교 및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졸업.

댓글목록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게시판 전체검색